이미지는 «언다잉» 180~181쪽과 인터뷰 <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세요>의 한 대목입니다(모두 양미래 옮김).
wp.me/p8rTHV-mq
이미지는 «언다잉» 180~181쪽과 인터뷰 <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세요>의 한 대목입니다(모두 양미래 옮김).
wp.me/p8rTHV-mq
경험을 구성하는 수많은 측면이 상당한 가시성을 얻게 된 반면 경험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조건은 전보다 악화되었으며 그런 사실을 고군분투 끝에 인식해 봤자 실망스럽게도 또 다른 형태의 묵인으로 귀결될 뿐이고 다시 또다시 고군분투해 본들 여느 때처럼 새로이 실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 이제는 명백해 보인다. 가시성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겉으로 드러낼 것인지와 관련된 권력 관계에 뚜렷한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눈에 보이는 먹잇감을 사냥하는 일을 더 용이하게 만들 따름이다.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180쪽.
사람들은 가시적인 방식으로 죽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걱정하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고통받으며, 온 세상은 온 세상에 대한 감시에 전면 노출된 상태다. 드론은 가시적인 희생양들을 살해한다. 기업들은 가시적인 우리의 서신을 데이터 마이닝하고 가시적인 우리의 클릭 수를 계산한다. 우리는 가시적인 지지 집단들의 게시판에 우리의 고뇌를 게시한다. 새와 구름은 여전히 그 무엇에도 더없이 무관심한 반면 하늘의 인공 위성은 가시적인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한때는 사적 영역이었던 몸속이 이제는 의료 기기 화면을 통해 가시성을 얻는다. 오늘날 살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예전만 해도 직접 경험해 보아야 했던 것들이 이제 불길하게도 죄다 가시성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는 현명하다. 문제를 파악해도 진정으로 원하는 해답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다만 이제 우리는 진실을 제한하는 기업 지배 구조 안에서 공통의 비극을 널리 공유하는 잔업거리만 떠안게 되었다.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180~181쪽.
그리고 이 비극의 비극 속에는, 남들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내 모순 속에는 모두가 알았으면 하는 슬프고 잘못되고 터무니없는 것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계속 불가사의하고도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남아 있으며, 나는 그런 것들 안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시각만이 유일한 감각은 아니라는 사실에 기대를 걸 수 있듯이, 이 세상의 운명은 음성적인 것들의 약속에 의지하고 있다.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181쪽.
샘 재피 골드스틴 작가님의 작품 중 상당수는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감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해 주실 조언이 있습니까? 앤 보이어 감출 것이 전혀 없는 분에게는 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시라고 권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비밀은 가급적 많이 확보해 두어야 해요. 스핑크스와 19세기 무정부주의자들처럼 말이죠. 수수께끼enigma라는 명사와 은밀한clandestine이라는 형용사의 매혹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 보면 최근에 제가 즐기고 있는 취미를, 뭔가를 망각함으로써 나 자신으로부터 감추는 취미를 갖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샘 재피 골드스틴, <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세요: 앤 보이어와의 인터뷰>, 양미래 옮김.
“가시성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겉으로 드러낼 것인지와 관련된 권력 관계에 뚜렷한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눈에 보이는 먹잇감을 사냥하는 일을 더 용이하게 만들 따름이다.”
강의를 많이 하시지 않아 늘 아쉬웠는데 «읽기»가 텍스트라니 기쁨도 배가 되네요. 4회라는 제약이 있겠지만 스피박의 읽기와 안준범의 읽기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드문 기회입니다. 스피박과 «읽기»(혹은 그저 ‘읽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오래전 안준범 선생님과 둘이서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원서와 함께 놓고 한 자 한 자 강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계기로 «읽기»를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고 «읽기» 작업 과정에서도 일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안준범 선생님은 정확하게 읽으려는 독자고 뉘앙스를 포착하고자 하는 번역자입니다. 선생님과 몇몇 텍스트를 함께 읽은 경험이 저희에게는 언어를 다룬다는 것의 무게와 즐거움을 실감한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경험이 책을 만드는 마음가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고요.
물론 스피박의 텍스트는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고 «읽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스피박이 반복해 온 테마들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읽는다면 그의 여정에 대한 그림을 얼마간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안준범 선생님의 강의가 마련되어 기쁩니다. 안준범 선생님은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랑시에르 등의 중요한 저작을 옮긴 번역자이자 오랫동안 스피박의 저작을 읽어 온 독자입니다. 무엇보다 저희에겐 선생님 같은 존재이고요.
스피박은 영원히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구절로 기억될 겁니다. 하지만 그는 80년대 중반에 던진 이 질문에 머물지 않고 비교 문학자이자 일종의 교육 철학자로서 부단히 이동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이동이 저희에게 준 자극을 전달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펴낸 책이 바로 «읽기»입니다.
인문서점 산책자에서 스피박의 «읽기»를 옮긴 안준범 선생님과의 북클럽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읽기»를 단독으로 다루는, 그것도 안준범 선생님이 직접 이끄는 강의는 이번이 처음 아닐까 싶어요. 함께 읽는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1단계 휴전안이 발효되었지만 언제 상황이 바뀔지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해방과 평화에 이르는 길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고요. 관심을 놓지 않고 해 왔던 일, 할 수 있는 일을 이어 가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회 참여가 그중 하나일 테고요. 10월 18일 오후 4시, 보신각에서 뵙겠습니다!
부스에서 도서를 구입하시는 분께 드릴 선물도 준비했어요.
1) 모든 구매자께 수전 아불하와의 «옥스퍼드 유니언 토론회 발언문» 소책자를,
2) 두 권 이상 구입하신 분께 «멸종»(애슐리 도슨 지음,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 절판 임박!)을 증정합니다(50부 한정)
이번 토요일인 10월 18일, 보신각에서 “우리가 모두 팔레스타인이다” 전국 집중 집회가 열립니다. 집회 때 여러 단체가 부스를 차릴 예정인데요. 저희도 두번째테제, 접촉면 출판사와 합동으로 참여해 팔레스타인 관련 책을 포함한 세 출판사 도서를 판매하려 합니다.
특히 저희는 «신을 기다리며»(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에 수록된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학과 공부의 올바른 효용을 논함>과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이종영 옮김, 새물결)에 실린 <가치의 개념을 둘러싼 몇 가지 성찰>이 이 글과 함께 읽기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첫째 여성을 붙잡은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그가 끼어들지 않아도 의미가, 감각이 우리를 붙잡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직접적이고 돌연하게 그의 정신에 닿은 것입니다. 편지 자체 속에 고통이 있어 편지를 읽는 얼굴로 달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편지지나 잉크의 색은 감각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고통만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중간 단계는 없습니다. 이행은 찰나에 일어납니다. 각각의 상황에서 두 읽기는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며, 다른 것들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들은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삶은 동일한 직물로 짜여 있고 잇달아 우리에게 부과되는 의미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리고 각각의 의미는, 그것이 나타나고 감각을 거쳐 우리에게 닿을 때, 자신과 대립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환영의 지위로 격하합니다.
수련 과정을 마치면 펜 끝에서 의미가 나타나거나 인쇄된 활자 속에서 문장이 나타날 겁니다. 뱃사람에게, 경험이 풍부한 선장에게 그의 배는 어떤 의미론 자기 몸의 연장延長이 됩니다. 배는 폭풍우를 읽는 수단이며 그는 승객과는 완전히 다르게 폭풍우를 읽지요. 승객이 혼돈을, 제한 없는 위험을, 두려움을 읽는 반면 선장은 필요를, 제한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을, 용기와 도의의 의무를 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읽기 개념을 둘러싸고 제기된 가치의 문제는 선만이 아니라 진실 및 아름다움과도 관계 맺습니다. 이 셋을 분리하기란 불가능하지요. 어쩌면 이로써 하나의 수수께끼인 이 셋의 연관 관계가 조금 더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생각하는 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리해 생각될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베유는 여느 감각적 수용과 구분되는 읽기의 독특함을 밝힌 뒤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행위 일반으로 읽기의 외연을 확장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읽기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이유, 하나의 읽기에서 다른 읽기로의 이행, ‘읽지 않음’의 상태 등 읽기와 결부된 몇 가지 논점을 압축적이고도 (특유의 비유 활용을 통해) 선명하게, 그렇지만 또한 미묘한 방식으로 해명하고자 합니다. 기존에 소개된 베유의 작업과 함께 읽으면 그의 읽기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책자로 제작해 지난 군산 북페어에서 배포한 시몬 베유의 <읽는다는 것에 대해>를 블로그에 게시했습니다. 베유가 1941년에 쓴 짧은 글로 저희가 아는 한에서는 이 번역이 초역입니다(이번에 블로그에 게재하며 주석을 두 개 추가했습니다). 읽기란 대체 무엇일까요?
wp.me/p8rTHV-Gq
많은 분께 그랬듯 저희에게도 작년 군산 북페어가 무척 들뜨고 신나는 행사였습니다. 1년 중 유일하게 참가하는 북페어라 더욱 각별한 느낌도 들고요. 작년에 대한 감사함과 올해에 대한 기대를 담아 저희 도서와 소책자를 준비했으니 44번 부스 많이 찾아 주세요🤗
이렇게 네 종의 소책자를 준비했습니다. 1~3은 저희 부스에서 구입하시는 분께 권당 한 부씩 증정하려 하고요. 4는 «그냥 우리»를 구입하시는 분께 추가로 증정하려 합니다. 그 외에 작년에 제작했던 포스터 잔여 수량도 구매자분들께 드릴 예정이에요(소진 시까지).
4. 김지승,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얼마 전 블로그에 게시한 김지승 선생님의 «그냥 우리» 서평도 화면으로만 읽기엔 너무 아까워 종이에 꾹꾹 새겨 들고 갑니다!
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빛과 사회주의>, 김수환 옮김/해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1930~30년대에 쓴 짧은 저널리즘 에세이 세 편을 번역하고 김수환 선생님의 해설을 더한 소책자입니다. 세계에 대한 플라토노프의 독특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군산에서 최초 공개!
2. 시몬 베유의 <읽는다는 것에 대해>
시몬 베유가 1941년에 쓴 단편으로 읽는다는 행위의 범위를 확대하고 여기에 어떤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는지 성찰하는 미묘한 글이에요. 북페어를 기념하며 읽기에 관한 글을 선물하고 싶어 옮겨 보았습니다.
1. 수전 아불하와의 <옥스퍼드 유니언 토론회 발언문>
올해 초 번역해 ‘팔레스타인 평화 연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많은 분의 마음을 울린 글이라 실물로도 나누고 싶어 소책자로 제작했어요.
2025 군산 북페어에 리시올/플레이타임 출판사가 참가합니다(44번 부스). 이번에도 문학과지성사 인문팀과 함께할 예정이에요. 또 작년에 이어 군산 북페어만을 위한 소책자 네 종(!)을 준비했어요😎🥰
그래선지 “기쁘게”라는 이 부사가 유난히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도 «그냥 우리»가 그런 기쁜 동행이 되길, 이 서평이 그 계기가 되길 바라 봅니다.
하나 더. 이 서평은 “그 외로움 끝에 사랑을 생성하는 힘으로 그와 우리의 시공간은 기쁘게 얽힌다”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기쁨을 느낀다면 그건 랭킨의 글이 읽는 사람 자신을 비롯한 다른 목소리들과 서로의 여백을 채우는 일종의 동행임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서평은 중간 지점에서 시작해 “균열과 반복, 귀환이 불연속적으로 구성하는” 서사 전통에 «그냥 우리»를 포함하고, 이로써 이 책이 소속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합니다. 또 이 책의 독특한 형식, 원본과 번역본의 물질적 차이에 주목해 빔과 채움의 관계성이 산출한 효과를 그려 보입니다.
«그냥 우리»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 김지승 선생님께 서평을 제안했고 써 보고 싶다는 흔쾌한 답신을 받았습니다. 당장은 일이 많아 7월 말경 원고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며칠 전, 그 시간이 온전히 담긴 글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라고 시작해 보자. 만약에 클로디아 랭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고장 난 구조의 일부라면. 흑인 차별적인 각본의 체제 안에서 기능하며 모든 장르의 관습을 재창조할 뿐이라면. 현재는 꽁꽁 막혔고 미래는 이미 상실되었다면. 구멍 난 과거만이 우리를 지탱한다면. 모든 걸 딛고 얻은 생존, 바로 그 생존의 콜라주인 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펼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기록과 자료를 기꺼이 나눈 흑인들이 공동 저자인 책의 서문을 읽을 수 있다면. 김지승,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그냥 우리»에서 랭킨이 여백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양쪽 페이지의 관계를 다양하게 설정해 현실을 재서사화하는 방식이 «딕테» 전체를 구성하는 다중 양식이기도 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디아스포라 존재의 시간과 공간은 주류 세계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 있다. 그로 인해 겪는 소외와 시차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다층적 시간성의 계승자인 랭킨은 ‘정의’Justice와 ‘그냥 우리’Just Us 같은 언어 유희, 주석의 범위 안팎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 이미지와 텍스트의 ‘좌우’ 이분법을 초과하는 관계성 등으로 맥락의 잔여를 흔들며 미국 흑인 여성의 시간을 가시화한다. 김지승,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400년 전으로부터 도착한 목소리들과 함께인 시도이자 오랜 곤경을 넘어서는 그의 대화 요청은 너무도 역동적이고 뜨겁고 부글거리고 출렁인다. 선 그어질 수 없는 물 위로 도착한 400년 전 새벽의 외로운 배들처럼. 그 외로움 끝에 사랑을 생성하는 힘으로 그와 우리의 시공간은 기쁘게 얽힌다. 김지승,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두 언어의 차이 덕분에 한국 독자는 영어본보다 약 30쪽 분량의 ‘텅 빔’을 더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랭킨의 말을 빌리자면 이 텅 빈 페이지에서 “만남이 새롭게 펼쳐지는 순간 우리 사이에는 이미 하나의 대화가 발생한 셈이다”. 우리가 갖게 된 더 많은 백지에 무엇을 교차하고 어떤 대화의 층위를 구성할지, 이제 랭킨의 외로움을 조금 나눠 가져도 좋지 않을까. 우리, 그냥. 김지승,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그냥 우리»를 작업하면서 국내 필자의 서평을 받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옮긴이 양미래 선생님과 저희 모두 김지승 선생님을 제일 먼저 떠올렸습니다. 흑인 여성 작가들,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에 새겨진 서사적 동질성을 발굴해 오신 선생님이라면 이 책을 어찌 읽으실지 궁금했어요.
최근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를 출간하신 김지승 선생님께서 «그냥 우리» 서평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를 써 주셨습니다. 감동적인 서평이에요🩵
wp.me/p8rTHV-FW
«그냥 우리»는 표현에 따라붙는 막막함과 괴로움보다 만들고 싶은 것을 떠올리고 실제로 만드는 즐거움과 기쁨이 훨씬 컸던 책이에요. 이 후기로 그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또 이 책은 북펀드를 통해 출간했고 준비 과정에서 독자분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제작했는데요. 후기에는 어떤 마음으로 리워드 제작을 결심했는지, 무엇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이 후기는 디자이너가 «그냥 우리» 원고를 읽으며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는지, 그것을 형상화하고자 분투하는 동안 어떤 것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기록한 글이에요.
«그냥 우리» 표지는 처음 구상할 때 떠올렸던 상이 비교적 일관되게 구현까지 이어진 사례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어요. 특히 백인 권력의 비가시성을 가시화한다는 책의 의도를 표현하는 동시에 ‘흰색’ 표지가 되어선 안 된다는 과제가 있었습니다.